좋은 글. 시

[스크랩]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jjs2275 2016. 7. 31. 09:31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갔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 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나희덕님의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전문 -

 

 

 

 

영화 호우시절을 보고 집에 와 두보의 시집을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한시산책을 펴들어도, 찾기 어려웠다.

 

그 무언가의 답답함에 눌려 이리저리 시집을 꺼내 읽다, 눈에 들어 온 시가 바로 나희덕님의 시.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이다.

 

평소 시집을 읽고 마음에 남은 시는 연필로 체크해 놓거나 책갈피 한쪽을 접어두거나 .....하는데,

이 시는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과거엔 아무런 울림이 없었던 시.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구절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보니 이렇듯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언제 한번 만나' '저녁 같이 먹자' '영화 한편 같이 보자' '단풍 좋은데, 산에 한번 같이 가자'

'언제 비오는날 날 잡아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자' '지리산 같이 가자' '해외 여행 함께 가자' .........

 

그렇게 내가 혹은 내게 말했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아프거나, 병들거나, 혹은 불의의 사고로

내 곁을 떠난다면,

봄날 볕 좋은 날 택해 한번 오라고 말한 그에게 가지 못하고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 시처럼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면.... 그 목메임을 어떻게 참아낼수 있으랴....

 

영화 호우시절처럼 시간이 흘러 더 좋은 관계를 맺는 해피엔딩도 있지만,

너무 늦게 그를 기다리게 하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를 보낼 수도 있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그늘이 좋아' '꽃 지기전에 놀러와'

 

오늘은 내게 말한 사람들, 다 기억해내고 놀러 가야겠다.

 

만나야겠다. 

 

 

 

출처 : 뜰 앞의 잣나무
글쓴이 : 봄여름가을겨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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