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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버지/강신용 외 9편(아버지에 관한 시 )

jjs2275 2014. 5. 22. 23:56

아버지/강신용

 

 

아버지는 없다
고향 마을에도
타향 거리에도

 

아버지

 

하늘 높이 불러보지만



세월뿐이다

 

 

-「나무들은 서서 기도를 한다」문경출판사 2003
-『반경환 명시감상 1』(종려나무, 2008)

 

 

 

아버지/이재무

 

 

어릴 때 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 파거나
낫으로 풀 깎거나 도끼로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물고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
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그냥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를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인터넷하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 다오
아버지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제51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목화밭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 2006)

 

 

아버지의 유산/황영선

 

 


아버지는 도덕 교과서,
아버지의 교과서엔 글자가 없다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이 길이라고 우길 때에도
아버지는 내 도덕 교과서에 밑줄을 긋지 않으셨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빠져 허우적일 때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펼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의 학교,
길눈이 어두워질 때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주신 도덕 교과서를 꺼내어 읽는다


세월이 가면 나의 아들딸도
내가 만들 교과서를 꺼내어 읽겠지


글자 없이 읽던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오늘은 소리내어 읽고 있다

 

 

 -시집『우화의 시간』(2010, 시문학사)

 

 

소주병/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코스모스/김사인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62

 

 

 

  아버지의 등을 밀며/손 택 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시집『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흔들리는 마음/임길택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1995) 
[한국인이 사랑하는 애송 동시. 50/40] 
 

 

 

문 열어라/허형만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 나가
잠긴 문 열어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시선집『따뜻한 그리움』(시와 사람, 2008)

 

 

 

한 벌의 양복/손순미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이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시집『절대 고독』(선문각, 1970)

 

 

*김초혜 시인은 어머니를 연작으로 썼고, 그 외 많은 시인들이 고향 만큼이나 어머니의 관한 시를

많이 썼지만 상대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시는 적은 것 같습니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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