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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jjs2275 2014. 7. 3. 19:37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안도현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가지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받는다

죽 한그릇 얻어 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 시집『외롭고 높고 쓸쓸한』(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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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1년 전,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트위트에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두고 언론에선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고 과장해서 알렸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그 가치를 눈속임하는 일들이 매일 터져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담 그 자체’라면서 ‘현실을 타개해나갈 능력이 없는 시, 나 하나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시를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괴롭다’고 ‘절필선언’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불의가 횡행하는 참담한 시절에는 쓰지 않는 행위도 현실에 참여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시를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을 뿐, 나는 오래 시를 바라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다른 산문이나 칼럼은 중단치 않겠다고 덧붙였다.

 

 말하자면 '부분 절필'인 셈인데 당시 무엇이 안도현 시인을 열받게 하고 분노케 했을까. 그리고 그 같은 선언은 왜 했던 걸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많이 닮은 이 시에서는 정작 열받을 일에는 그저 시무룩해져 있다가 무고한 가족들에 대한 사소한 불만에 짜증을 내는 것으로 그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1년 전 정황은 이 시의 상황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열 받아있음이 여실했다. ‘물이라고 하면 불이라 하고, 하늘이라고 하면 땅이라 하고, 진실이라고 하면 거짓이라 하고, 된장이라고 하면 똥이라 하는 사람들’의 실수와 패착이 ‘궁핍의 증거’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절필 선언 이후 안중근 의사 유묵 의혹을 제기 건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 및 후보자 비방’ 혐의 사건의 공판이 열렸다. 결과는 '예상'대로 일부유죄 판결이었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들이 전원 무죄 의견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을 깡그리 무시한 판결이었기 때문에 떳떳하지 않은 꼼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었다. 최고권력자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재판부는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후보를 비방한 것이어서 법이 허용하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일탈해 위법하다"라고 선고이유를 밝혔다. 일개 시인의 소신발언 한 마디에 벌벌 떨며 낙선의 위태로움을 느꼈다는 의미일까. 그런 논리라면 지난 2개월 여동안 비판과 지적과 비난의 화살을 날린 수많은 국민들도 같은 혐의로 입건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5월 한국작가회의가 연명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음에도 정부 여당은 '개무시'로 일관해온 터였다. 이런 것들이 실은 문인들을 열받게 하는 것들이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그동안 보여온 일연의 얍삽하고 쩨쩨하고 어리석은 짓들을 떠올리면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그렇다고 안도현 시인의 진단처럼 박근혜 정부가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아니 막상 그렇게 된다 해도 걱정거리이기는 하다. 다만 양심을 가진 자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에 설령 도움이 되지 못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양심은 지켜져야 하고, 양심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그 말문이 막혀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들을 그냥 흘려버리거나 듣는 척만 할 게 아니라 잘 새겨듣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야 누가 뭐라 입을 대겠나. 안도현 시인의 분노는 ‘열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 것에 더욱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란 일부 핏기 없는 젊은이들과 중늙은이들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체면과 탐색과 평론과 의견과 주장과 침묵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할 때’가 ‘지금’인가 하는 점에는 이견이 있고 온도차가 있다. 더구나 펜을 집어던지자고 선창하는 데에 그를 따라나선 시인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절필선언’이 일반인들의 문인에 대한 왜곡된 시각도 없지 않았다. ‘우매한’ 국민의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절필을 하려면 아예 아무 것도 쓰지 말든지, 산문은 쓰고 운문은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곱지않은 시선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대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해야하는 사람이다. 하물며 자신의 통점에서 발화한 언어가 '정치적 발언'으로 매도되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화가 난다. 문단 말석에도 끼지 못하는 나 같은 시인으로서도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권순진

 

Stay with me till the morning- Dana Winner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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