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자고 / 최영미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나
속 뒤집어놓는, 저기 저 감칠 햇빛
어쩌자고 봄은 오는가
사시사철 봄처럼 뜬 속인데
시궁창이라도 개울물 더 또렷이
졸 졸
겨우내 비껴가던 바람도
품속으로 꼬옥 파고드는데
어느 환장할 꽃이 피고 또 지려 하는가
죽 쒀서 개 줬다고
갈아엎자 들어서고
겹겹이 배반당한 이 땅
줄줄이 피멍든 가슴들에
무어 더러운 봄이 오려 하느냐
어쩌자고 봄이 또 온단 말이냐
최영미, 서른잔치는 끝났다 (1994)
차(茶)와 동정(同情) / 최영미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 차와 동정뿐.
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
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
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서투른 배우 / 최영미
술 마시고
내게 등을 보인 남자.
취기를 토해내는 연민에서 끝내야 했는데,
봄날이 길어지며 희망이 피어오르고
연인이었던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
엉키고 풀어졌다,
예고된 폭풍이 지나가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너와 나를 잇는 줄이 끊겼다
얼어붙은 원룸에서 햄버거와 입 맞추며
나는 무너졌다 아스라이 멀어지며
나는 너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
우리 영혼의 지도 위에 그려진 슬픈 궤적.
무모한 비행으로 스스로를 탕진하고
해발 2만 미터의 상공에서 눈을 가린 채
나는 폭발했다
흔들리는 가면 뒤에서만
우는 삐에로.
추억의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들이 부활해
야구경기를 보며, 글자판을 두드린다.
너는 이미 나의 별자리에서 사라졌지만
지금 너의 밤은 다른 별이 밝히겠지만…
『문학사상』, 2009.
'좋은 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耳順에 / 김남조 (0) | 2016.02.24 |
---|---|
[스크랩] 귀가 서럽다 / 이대흠 (0) | 2016.02.24 |
[스크랩] 이수동님의 "오늘, 수고했어요"중에서 (0) | 2015.12.17 |
[스크랩] 여자가 지켜줘야 하는 남자의 6가지... (0) | 2015.10.22 |
[스크랩] 향기/김용택 (0) | 201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