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간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 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 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 시조집『해남에서 온 편지』(태학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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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작인 이 시는 따로 사투리 풀이가 없더라도 편지 사연에 푹 빠져 읽어가다 보면 그 정서가 덩어리째 스며들어 오 난독의 염려가 적긴 하지만 몇 가지 시인이 가르쳐주는 대로 덧붙이자면, 비민하것냐만→ 어련히 알아 하겠냐만, 징허긴 징헌갑다→ 심하긴 심한가보다, 너할코→ 너마저, 제금 나고→ 결혼해서 떠나고를 뜻한다. 그리고 이 시의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어 마저 소개한다. “내가 있는 학교의 제자 중에 수녀가 한 사람 있었다. 몇 해 전 남도 답사길에 학생 몇이랑 그 수녀의 고향집을 들르게 되었는데 다 제금 나고 노모 한 분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생전에 남편이 꽃과 나무를 좋아해 집안은 물론 텃밭까지 꽃들이 혼자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흐드러져 있었다.”
얼마 전 우연히 이지엽 시인을 포함해 여럿이서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들은 바에 의하면 이젠 그 수녀의 어머니가 그 집에 사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이사를 하신 것인지 세상을 떠나셨는지는 더 묻지 않았으므로 영문은 잘 모르겠다. 그리움은 보고픈 감정이 해결되지 않을 때의 묵힌 정서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그리움이 별밭에 일렁이는 은하수라면 고향에 계시는 부모들의 도회로 나간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은 차라리 겨울 비탈에 선 애절한 나목이다. 부모 둥지 떠난 자식들의 고향 찾는 횟수가 고작해야 일 년에 두어 번. 아니면 그조차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너나없이 승용차가 있고 씽씽 KTX가 달린다 해도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힘들게 고향을 찾아와서도 재깍 내빼고 복귀할 태세다. 그래야 잘 나가는 자식처럼 보인다.
우리 '엄니'들이 일찌감치 명절날 달력에 동그라미 치고 그리움을 예약하시는 마음에 비해 설 한나절부터 서두르는 귀경행렬을 보면 도회 사는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참 야속하고 사무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해남출신 이지엽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이 노모는 홀로지만 참으로 꿋꿋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을 혼자 보기 아깝다면서 짐짓 자식들에게 유혹의 추파를 보내지만 먹혀들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안다. 우린 머지않아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15%에 달하는 노령사회가 될 것이며, 특히 전남만 떼놓고 보면 지금도 65세 이상 인구가 22%를 차지해 이미 노령사회로 들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노령사회는 선진국형 모델이지만 노인복지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허당이다.
수녀가 되어 종신서원 받은 딸자식과 엄마의 특수한 관계와 사정은 별개로 치고, 지금 우리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모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앞으로는 사랑과 그리움의 불균형이 더 심화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우리 자식들이 부모를 받들어줄 것이란 기대는 거의 무망하다. 노후의 경제적 안정 못지않게 정서적 안정과 자립이 필요한 때다. 도리 없다. 자식에 대한 기대는 팍팍 줄이고 그리움 또한 탈탈 털어내는 수밖에는...
권순진
고향집 가세 -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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