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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서럽다 / 이대흠 어머니의 꽃밭 꽃이 어디 있었다냐 다 노물이었제
빈 땅이라면 손톱눈만한 자리라도 마늘이며 고추며 오이를 심었던 어머니가
칠순 넘어 웬걸 꽃밭을 만드신다
인자 가슬 되먼 마당이 환할 것이다 뜰 가득 댕댕이꽃 돌나물 구절초를 모종내는 어머니
고방 깊숙이 무씨 두듯 감추어두었을 설움이나 슬픔 같은 것
우북우북 피어나 얼굴 가득 꽃밭이다
만개한 저승꽃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슬픈 악기 /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2010.창비
지나온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 / 이대흠 - 호삼에게 -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 불 속으로, 그 남자 / 이대흠 -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은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노래방에 가서건 결혼식에 가서건
노래를 하려고 보면 꼭 생각나는건
서러운 곡조뿐이네
기쁨을 말해야 하는데
신나는 노래도 많은데
몸속 어디에
슬픔의 청이 붙어 있나
산에 오르면 산으로 가득 차야 하건만
마음의 길은 자꾸 떠나온 쪽으로 뻗는다
세상 밖으로 가지 못한 바람 불고
추억은 소매치기처럼 떠오른다
사람의 말들이 이슬로 내리던 밤이 있었다 그 밤에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밤을 새웠다 나는
외로워지고 싶어 자꾸 지껄였다
그 여자는 가늘었다 가는 여자 가버린 여자
그 남자는 흘러갔다 흘러간 남자 홀로 간 남자
그 여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남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가는 것들이 나를 갉아 나는 자꾸 작아진다
구슬처럼 작아져 나는 왔던 길로
거슬러 가지 못한다 헉헉대며 굴러온 세월
오래 된 인간의 말들이 돌 되어
길을 막곤 했다
세상이 나보다 더럽게 보여
깨끗한 극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저지르고 싶어 팔 무너지고 싶어
이 집은 그 집이 아니야 그 집은 어디 갔지?
나는 왜 자꾸 철거당하는 걸까?
산 깊어 길 없고 지나온 길들이 내 안에서
실타래처럼 풀린다 이 언덕은 미끄러워 자꾸
나를 넘어뜨린다 감자처럼 궁구는 내 몸뚱이
세월은 비탈지구나 그러나
세상을 믿어 나는 괴로웠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상처가 남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한 사람만큼의 상처가 남는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건 씹다 뱉는 희망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를 부르며
나는 걷는다
생의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세월이여
불행으로 삶을 엮는 사람의 죽음은 불행인가 무엇이
지나온 길을 내 안에 묶어 두는가
마음속 우거진 슬픔을 누가
벌초해주리 그 남자
함부로 돋아나는 슬픔의 밑동을 자르며
불 속으로 그 남자 세상 속으로 온몸을
불 속으로 밀며 나사처럼 야위어
어긋난 세상에서 헛돌며 자꾸
헛돌며 뱅뱅 불 속에서 세상
속에서 헛돌며 슬픔은 나비떼 뱅뱅
날아오르고 아찔해 그 남자
세상의 불 속으로 걸어가네 흐느낌 없는
세상은 뜨거워 그 남자 헐거운 몸으로
세상을 조이고 있네 세상 속에서
불 속에서 녹슬지 않는 몸으로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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