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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귀가 서럽다 / 이대흠

jjs2275 2014. 5. 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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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서럽다 / 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은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어머니의 꽃밭

 

꽃이 어디 있었다냐

다 노물이었제

 

빈 땅이라면 손톱눈만한 자리라도

마늘이며 고추며 오이를 심었던 어머니가

칠순 넘어 웬걸 꽃밭을 만드신다

 

인자 가슬 되먼 마당이 환할 것이다

 

뜰 가득 댕댕이꽃

돌나물 구절초를 모종내는 어머니

 

고방 깊숙이 무씨 두듯

감추어두었을 설움이나 슬픔 같은 것

 

우북우북 피어나

얼굴 가득 꽃밭이다

 

만개한 저승꽃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슬픈 악기 / 이대흠


노래방에 가서건 결혼식에 가서건
노래를 하려고 보면 꼭 생각나는건
서러운 곡조뿐이네

 
기쁨을 말해야 하는데
신나는 노래도 많은데
몸속 어디에
슬픔의 청이 붙어 있나

 

 

시집 <귀가 서럽다> 2010.창비

 

 

 

 

 

 

 

 

지나온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 / 이대흠

 

- 호삼에게


산에 오르면 산으로 가득 차야 하건만
마음의 길은 자꾸 떠나온 쪽으로 뻗는다
세상 밖으로 가지 못한 바람 불고
추억은 소매치기처럼 떠오른다
사람의 말들이 이슬로 내리던 밤이 있었다 그 밤에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밤을 새웠다 나는
외로워지고 싶어 자꾸 지껄였다
그 여자는 가늘었다 가는 여자 가버린 여자
그 남자는 흘러갔다 흘러간 남자 홀로 간 남자
그 여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남자를 나의 길(道)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가는 것들이 나를 갉아 나는 자꾸 작아진다
구슬처럼 작아져 나는 왔던 길로
거슬러 가지 못한다 헉헉대며 굴러온 세월
오래 된 인간의 말들이 돌 되어
길을 막곤 했다
세상이 나보다 더럽게 보여
깨끗한 극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저지르고 싶어 팔 무너지고 싶어
이 집은 그 집이 아니야 그 집은 어디 갔지?
나는 왜 자꾸 철거당하는 걸까?
산 깊어 길 없고 지나온 길들이 내 안에서
실타래처럼 풀린다 이 언덕은 미끄러워 자꾸
나를 넘어뜨린다 감자처럼 궁구는 내 몸뚱이
세월은 비탈지구나 그러나
세상을 믿어 나는 괴로웠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상처가 남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한 사람만큼의 상처가 남는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건 씹다 뱉는 희망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를 부르며
나는 걷는다
생의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세월이여
불행으로 삶을 엮는 사람의 죽음은 불행인가 무엇이
지나온 길을 내 안에 묶어 두는가

 

-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

 

 

 

불 속으로, 그 남자 / 이대흠


마음속 우거진 슬픔을 누가
벌초해주리 그 남자
함부로 돋아나는 슬픔의 밑동을 자르며
불 속으로 그 남자 세상 속으로 온몸을
불 속으로 밀며 나사처럼 야위어
어긋난 세상에서 헛돌며 자꾸
헛돌며 뱅뱅 불 속에서 세상
속에서 헛돌며 슬픔은 나비떼 뱅뱅
날아오르고 아찔해 그 남자
세상의 불 속으로 걸어가네 흐느낌 없는
세상은 뜨거워 그 남자 헐거운 몸으로
세상을 조이고 있네 세상 속에서
불 속에서 녹슬지 않는 몸으로
그 남자

 

-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 -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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