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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jjs2275 2014. 4. 22. 23:02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위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시선집『타는 목마름으로』(창비,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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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유신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의 열망을 절규한 70년대 초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Liberte)’와 닮은 부분이 없지 않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등 총 20연이 마지막 연 ‘자유여’를 부르기 위해 간절하게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를 반복하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그 ‘자유’를 ‘민주주의’로 대체한 시라 하겠다.

 

 가슴 속 목마른 민주주의의 이름을 이른 새벽 뒷골목에서 남 몰래 써야 한다는 시적 상황엔 당시의 현실이 진하게 농축되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론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대신 그가 1974년 인혁당 사건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글로 인해 구속되어 공산주의자라고 내몰려진 상황에서 그가 한 '양심선언'을 눈여겨봄이 옳지 싶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이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며, 억압받는 한국 민중의 하나이며, 특권, 부패, 독재 권력을 철저히 증오하는 한 젊은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 자신을 굳이 무슨 주의자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나는 이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지금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은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민주주의란 엄숙한 어휘가 낮은 포복으로 기어야하는 환경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일련의 곪아터진 부조리와 만성화된 안전 불감증, 시시때때로 사람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미뤄보면 여전히 국민의 민주적 정서에 반하는 특권의식, 정경유착, 공무원의 무사안일, 개인의 영달과 보신주의 등이 존재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권력이 집중된 곳에는 그 권력에 빌붙은 뒷거래로 잇속을 챙기려 하거나 역겨운 아첨의 혓바닥 놀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수작 뒤에서 욕망의 돈다발이 토스되고, 혈세가 새어나갔으며 그 아류에 의해 짓밟힌 민초의 아픔 또한 컸다.

 

 지금은 ‘타는 목마름으로’ 외칠 만큼 민주주의가 절박한 시절은 아니라 해도 우리를 옥죄는 이 답답하고 깝깝한 심정은 무언가. 신이 편하면 발을 잊고 띠가 편하면 허리를 잊듯이 정치가 편안하면 나라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좋으련만 지금 우리는 살갗에 닿는 모든 것들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질 정도다. 언제나 우리는 나랏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안온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지금 국민의 분노와 질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또 다시 암울해질 것이다. 이제 그들이 깽판을 치는 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들이 우리들의 울대를 옥죄고 있는 현실을 더는 지켜보지 못하겠다. 김지하 시인은 한물 쑥 빠졌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꺼이꺼이 다시 ‘민주’를 부른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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